1. 역사학 - 한국역사 근세 근현대 구석기
1). 한국역사
한국사의 시대 구분은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구분되는 선사시대와 고조선의 성립 이후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까지의 고대, 고려 시대인 중세, 조선 시대인 근세, 대한제국 수립 이후 오늘날까지의 근현대 등으로 구분된다. 한국의 역사 또는 한국사는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동아시아의 한반도, 만주, 연해주 지역을 바탕으로 전개된 한국의 역사이다. 한국의 역사는 고찰하고자 하는 영역에 따라 한국의 경제사, 한국의 생활사, 한국의 정치사와 같이 분야별 역사로 나뉘어 다루어지기도 한다.
2). 근세
문화적으로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판소리, 탈춤, 한글 소설, 서민 음악이 유행하였고, 생활 도예가 공예의 중심이 되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신진사대부와 손잡고 1392년 조선을 건국하였다. 세종이 왕위에 있던 시기, 한글이 창제되고 측우기, 앙부일구와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도 이루어졌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지만, 수군을 이끈 이순신 장군의 노력과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을 비롯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난 덕분에 결국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1620년와 1630년대에 걸쳐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붕당 정치가 변질되고 그 폐단이 심화하면서, 노론과 남인 위주의 일당전제와 경향이 두드러졌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서민은 점차 경제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생산력 또한 향상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영조, 정조 시대에 다시 중흥하다. 이때 실학이 융성하였고, 천주교가 일부 남인에 의해 학문의 일부로서 전래하였다. 그리고 양명학이 전래하였으며 천문학과 의학, 농업과 상업 분야에서의 기술적 성과가 산업 발전을 촉진하였다. 한편으로는 양반층이 증가하고 농민의 분화가 이루어지는 등 반상제의 신분제가 동요하였다. 세도 정치 시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일어났다. 홍경래의 난, 임술 농민 봉기 등은 조선의 신분제 사회가 갖고 있던 문제점과 지방 관리의 학정이 결합하여 일어난 것이다.
3). 근현대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많이 증가시킬 수 있었다.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에 압력을 행사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1910년에는 유적인 합방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두 조약 모두 강압에 의한 것이며 법적으로는 무효라고 볼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판소리, 탈춤, 한글 소설, 서민 음악이 유행하였고, 생활 도예가 공예의 중심이 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조선에는 같은 외세의 접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위기 속에 흥선대원군은 철저한 봉쇄 정책으로 일시적으로 접근을 막았으나, 이후 주위의 열강들과 무력 분쟁을 겪는 등 제국주의와 맞서게 되었다. 1870년대 초반에 일본은 조선에 무력으로 압력을 행사하면서 이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청나라와 충돌하였고, 한국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하였다.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조선과 랴오둥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삼국간섭에 의해 잠시 물러섰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게 암살되었다. 1897년 10월 12일,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새롭게 정하였고,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의 부당한 요구와 간섭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한국의 곳곳에서는 의병들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부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되는 시기까지를 군정기 또는 해방정국이라고 한다. 해방정국에서 남과 북은 극심한 좌우 갈등을 겪었다. 북에서는 조만식과 같은 우익 인사에 대한 탄압이 있었고, 남에서는 여운형과 같은 중도 좌파 정치인이 암살되었다. 국제사회에서는 모스크바 3상 회의를 통해 소련과 미국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신탁통치를 계획했지만, 한국에서의 극심한 반대와 함께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폐기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가 별도로 수립되면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는 기준이 되었다. 분단 이후 양측 간의 긴장이 이어졌고 수시로 국지적인 교전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일제히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침략하여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4). 구석기
약 70만 년 전부터 한반도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충청북도 단양군의 금굴, 평안남도 상원의 검은모루 동굴, 덕천군의 승리한 동굴 최하층 유적, 양평군 개군면 석장리 등에는 기원전 70만년 경의 뗀석기와 동물 뼛조각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기원전 70만년 전부터 기원전 6000년경까지 시기에 해당한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초기의 인골은 약 10만년 전의 평양시 력포구역에서 발견된 역 포인트와 덕천군 승리 산의 중층에서 발견된 덕천인과 단양 상시 바위 그늘에서 발견된 기원전 3만 9천년 경 남성의 아래턱뼈 상시인 등이 그들로, 이들은 호모 하이델베르켄시스에 해당하는 것으로 정해진다. 기원전 4만 년경에 현생 인류가 출현하면서 기원전 3만년 경에 한반도에 도래, 주변 환경에 적응하면서 작은 씨족 사회가 서서히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구석기 시대의 인류가 자생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에 대한 실증적 자료는 없다. 1962년 함경북도 울기 굴포리를 시작으로 개군면 석장리, 제천시 점말동굴, 덧천 승리한 동굴 등에서 구석기 시대의 인골 발굴이 늘어나고 있으나 아직은 체질적인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유골이 발견되지는 않고 있다. 연천 전곡리 유적: 전곡리 유적은 1979년부터 1992년까지 10여 차례의 발굴 결과 전기 구석기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된 중요한 유적이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이면 전곡리에 있는 해발 61m의 낮은 구릉지대에서 다섯 군데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유적으로는 주먹도끼, 박편도끼, 뾰족 찍개 등이 있다. 전곡리 석기는 대부분 석영이나 규암으로 된 자갈을 이용한 것으로 큰 자갈의 박편을 떼어낸 뗀석기나 작은 자갈을 다듬은 원해 석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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