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학 - 고대 삼국 고구려
1). 고대
한국의 고대는 대략 기원전 1세기부터 900년까지의 시기로, 원삼국시대의 크고 작은 국가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합쳐진 삼국시대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시기까지다.
2). 삼국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연맹은 각자 고유의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 시작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주변의 소국을 흡수하여 강대해졌다. 이들 나라는 이렇듯 고조선 사회의 외곽에서 시간적 선후를 지니며 각자 독자적으로 성립했고, 4세기 중반 이후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기 전까지 상당한 기간 서로 별다른 교섭 없이 발전해 나갔다.
3). 삼국정치
고구려에서는 3세기 전반까지도 소노부가 자체의 종묘와 사직, 즉 조상신과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상당한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시간의 지남에 따라 왕권이 점차 강해져 관등제가 확충되고 기존의 집단별 상하관계를 일원적인 군신의 관계로 변화시키게 되었다. 삼국 시대 초기 국가들의 정치는 국왕과 지방 세력인 각 부의 연맹 왕국 형태였다. 고구려에는 5부가 있었으며, 백제 역시 고구려-부여계의 이주집단이 부를 형성하였고, 신라에는 6부가 있었다. 이들 부는 독자적인 무력 행위나 외교를 할 수는 없었으나 자기 영지 내에서는 독자적인 자치를 누렸다. 이러한 왕권 확립의 결과 각 나라에서는 율령이 반포되고 호구를 조사하여 세입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귀족의 권위는 여전히 막강하였으며 실제 국정의 운영은 이들 귀족과 왕의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대대로, 백제의 정사암 고사, 신라의 화백제도 등은 삼국시대 후기까지도 귀족의 권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4). 삼국언어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어휘와 이두 표기에서도 이들의 언어는 공통점이 많으며 중세 국어와도 통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 각 나라의 언어는 의사소통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같았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3국 사이에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 별다른 통역이 필요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중국 측의 기록에서도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와 동예 옥저의 말을 비슷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양서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복장과 예절, 언어가 비슷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5). 고구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훈장 유역에 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다. 1세기 태조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668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지배한 고대 국가이다. 또한 태조왕은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켜 영토를 넓혔다.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 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미천왕은 서안 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마지막으로 671년, 당나라 장수 샅이 요동 지역에 남아 있던 검모잠의 잔당을 토벌하면서 전멸하였다. 고안 승이 이끄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은 호남 지방으로 이동하여 신라의 힘을 빌려 금마저에 보덕국을 세웠다. 신라의 괴뢰국으로 활동하며 나당 전쟁에 참여하고 일본과 견 고려사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주고받았다. 호남 지방의 보덕국은 초대 왕인 보덕 왕이 신라에 친화적이었으나 보덕 왕이 신라에 귀순하자 보덕 왕의 친족 조카 대문의 난으로 멸망하였다.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의 9주 5소경 중 하나인 남원경으로 이주하여 거문고 등의 고구려 문화가 한반도 남쪽에 정착되는 데 관여했다. 랴오둥반도에서는 보장왕의 손자 앙갚음 왕 고등보통학교 원이 측천무후의 힘을 빌려 당나라의 괴뢰국인 소고구려 등을 건국하였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 백제와 전연의 공격으로 일시적인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소수림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태학을 설립하고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였으며, 율령을 제정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를 완성하고 다시 나라를 정비하였다.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침공하여 남쪽 영토를 임진강과 한강까지 확장했고, 신라의 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또한 북으로 후년을 쳐서 요동을 완전히 차지하고, 아울러 요서 지방의 일부까지 진출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속심과 동부여를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통교하였고, 유연 등 새 외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여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였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남쪽의 아산만까지 지배하였다. 6세기 중반에 들어서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고구려는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을 깨고 고구려에서 빼앗은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였으며, 지금의 함경도 지역 일부에까지 진출해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589년 중국에 새로 들어선 수나라는 고구려를 4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소 고구려는 당나라의 괴뢰국으로 있다가 발해에 편입되었다. 그 후 고구려의 공백은 발해가 계승하였다가 망하자 대관형이 유민을 이끌고 왕건에게 귀순하며 고려로 이어졌으며 고려의 국호가 변형되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문 코리아가 되었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 대첩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곧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의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대당 강경책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에게 대패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 갔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민심이 혼란해져 있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혼란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신라로 들어갔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랴오둥반도와 한반도의 해서 지방과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 운동이 전개되었다. 해서 지방을 근거지로 670년부터 검모잠은 군사를 일으키고 왕족인 고안 승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였으며, 신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된다. 그러나 내분으로 인해 검모잠과 안 승이 싸우게 되고, 670년 8월 안 승이 검모잠을 살해하면서 검모잠의 부흥 운동은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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