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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역사학 - 조선 말기

by go1700 2024.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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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 - 조선 말기

 

1).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를 물리치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유지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정책이 개방되었다. 이어 1876년 2월 27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이후 미국 등 서구 열강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1882년에는 구식 군인의 차별 대우에 따른 저항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1884년 12월 4일에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개화 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인 갑신정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상을 반영하였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무너졌으며,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척사 운동은 점점 격화되는 열강의 침략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급 등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고 집강소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의 어린 둘째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였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켜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그것을 위해 수많은 백성이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파병된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이에 고종은 반일 정책을 구체화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명성황후시해사건). 1895년 10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였던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한편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한국사에서의 근대는 일반적으로 1864년 1월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시기로 분류된다. 대한제국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존속한 제국이다.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추진 운동과 민권운동이 활발했으며, 정부 주도의 근대적 개혁인 광무 개혁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근본적인 개혁이 아닌 '구본신참' 성격의 점진적인 개혁으로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들의 간섭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독립협회도 수구파의 거센 저항을 받아 해체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서구의 문물과 사상이 더욱 유입되었다. 한편 일본은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1904년 2월 23일,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에 '한반도 내에 영토, 시설 등 군사적 이용을 협조할 것'을 강요하는 내용의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고,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1904년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는데,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제국이 전략적인 승리를 얻게 되어 한반도에 영향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어서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일방적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제2차 한일 협약의 성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한성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고,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60일간의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무력 진압하였다.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일제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들어가며 국권을 강탈당했다. 이에 사회의 각계각층에서는 일본제국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늑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오적 암살단 등이 조직되어 친일파 처단에 앞장섰으며, 다시 의병이 조직되어 무장 항전을 벌였다. 1905년 이후에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 신민회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일본에 의해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 일본은 통감부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제국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으며, 이면 협약을 통해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이에 반발한 군인들이 의병과 가담하여 의병 운동의 양상은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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