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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역사학 - 중일전쟁

by go1700 2024.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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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 - 중일전쟁

 

1). 중일 전쟁

 

만주사변으로 만주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일본 제국은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웠다. 이어,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일-만 블록경제'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한편, 국제연맹은 '만주를 불법 침략, 점령한 일본 제국의 만주 지역 철수'를 결의하자, 일본은 1933년 3월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였다. 국제 연맹이 일본군의 만주 지역 철수를 결의한 이유는 1차 세계대전의 연장인 터키 독립 전쟁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 시민군에게 패함으로써 로잔 조약에서 식민지 일부를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서방 국가들은 일본이 식민지 확장에 나서는 것은 일본의 강대국 부상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나오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식민지를 포기하게 되었을 때 일본에도 똑같이 식민지 포기를 요구한 것이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은 격동의 시대였다. 중국의 사회질서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나기 위해 시작한 한편으로, 각지에서는 혼란을 틈타 여러 군벌 세력이 발호하였고 이러한 군벌 세력들은 주민에 대한 온갖 갖은 수탈과 함께 열강 세력에 빌붙는 등 매국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산둥 지방 내 독일 제국의 이권을 일본 제국에 양도한다."는 파리 강화 회의의 내용이 알려지자, 1919년 5월 베이징 지역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반군벌', '반제국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5.4 운동 이후 중국에서는 민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광둥 지방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창당되고 1924년부터 여러 지역에 널리 퍼진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국민 혁명', '제1차 국공 합작'이 전개되었다. 국민당의 당수 쑨원이 사망한 이후, 국민당 당수가 된 장제스는 쑨원의 정신을 이어받아 북벌 운동을 전개하여 강력히 추진하였다. 장제스는 북벌 운동으로 북양군벌 세력들을 몰아내고 사실상 중국을 장악하게 되었고, 1927년부터는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1931년 만주 사변을 시작으로 일본 제국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공산당을 토벌하는 데 차질이 생긴 장제스는 군벌 세력들과 연합하게 된다. 중국 관내에서는 많은 항일 무장 부대가 편성되기 위해 시작하였다. 김원봉과 김규식, 지청천, 조소앙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 산하의 조선의용대와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김두봉 등이 주도한 조선독립동맹 산하의 조선의용군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 인사들이 충칭의 임시정부로 합류하자, 당 산하 조선의용대의 다수 세력은 화북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하였다. 그 후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고 독립동맹의 산하 군조직으로 편성되었다. 1910년 이후로 침체하였던 외교 독립론은 1933년 이승만이 제네바 회의에 참석한 것을 이후로 여러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외교 활동은 1930년까지도 미미하다가 1932년의 윤봉길, 이봉창의 거를 계기로 활기를 띠게 된다. 이승만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국 독립의 승인을 요청했고, 1941년의 태평양 전쟁 이후 그의 노력이 부분적으로 성과를 거두게 된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연합군에 가담해 일본과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한국광복군을 연합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미얀마와 인도 일대에서는 영국군의 지원요청으로 주로 심리전 역할을 담당하였고, 미국의 OSS 전략사무국과 함께 정진운을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으나, 도중에 일본이 항복하여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일제강점기는 일본 제국이 연합군에게 패망함으로써 1945년 8월 15일 종료되었다. 중일 전쟁은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 사이의 대규모 전쟁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국 항일 전쟁, 일본에서는 일 중 전쟁 또는 지나 사변, 서구권에서는 제2차 중일 전쟁이라고 부른다.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독일령이었던 중국 산둥반도의 교주 만과 독일령 남양군도를 점령하였다. 산둥반도를 점령한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에 대해 만주와 산둥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 구화하고 남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21개의 특혜 조건을 요구하였고, 중국의 위안스카이 정부는 같은 해 5월 이를 수용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5·4 운동과 같은 격렬한 배일 여론에 밀려 실패하였다. 이 21개 조에 대한 처리는 중국의 민중이 위안스카이에게서 이탈하는 계기가 된다. 일본이 이처럼 아시아의 독보적 강대국으로 인식되면서 급부상하게 되는데, 이 무렵 일본 제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로 경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 경제 대공황을 맞게 되면서 경제적 불황으로 인해 극우 군부 세력들이 암살 및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고, 일본의 민간 의회 정부는 전복되었다. 이어 일본은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식민지를 더욱 확보하고자 침략 전쟁의 길을 걷게 된다. 자원이 풍부한 만주 지역을 얻으려 전쟁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만주 군벌 장쭤린 폭사 사건 등을 조작하였고, 만주 침략에 반대하였던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을 암살한 데 이어 1931년 선전 포고도 없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중일 전쟁은 20세기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1931년 이후로 두 나라 사이에 간헐적으로 교전이 있었으나, 전면전은 1937년 이후로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연합국에 대한 항복과 함께 1945년 9월 2일 종료되었다. 전쟁은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결과였으며, 원료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민족주의와 민족자결주의는 전쟁을 중국의 승리로 이끌었다. 1937년 이전에는 양쪽이 다양한 이유로 소규모, 국지적 전투를 벌였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그 연장에서 일어난 1937년의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두 나라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의 기간에는 중국이 단독으로 일본에 맞섰으며 진주만 공격 후 중일 전쟁은 더 큰 규모의 제2차 세계 대전에 포함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전력은 급속히 쇠퇴했고 1944년쯤에 일본은 이른바 '대륙 타 통장 전'을 개시하면서 반격을 꾀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가 연합군에게 발표한 차라리 무조건 투항 및 전면 항복 선언과 아울러 같은 해 9월 2일 연합국에 대한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을 끝으로 중일전쟁 역시 종결되었다. 사상자는 2,000만명이 넘었다. 일본의 상황. 1914년 유럽 및 중동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은 영일 동맹을 이유로 연합국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그 진의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의 지위를 더 높이고 국제적인 발언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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